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몬 신호장 (문단 편집) == 조몬터널 == 신호장이 역 북쪽의 조몬터널과 매우 가깝기 때문에 여객영업을 하던 시기에 당직 직원이 심령현상을 겪었다고 한다. 조몬터널은 건설 당시 가혹한 [[강제노동]]으로 악명이 자자하여,[* 당시 홋카이도에서는 [[https://ja.wikipedia.org/wiki/タコ部屋労働|문어방 노동(タコ部屋労働)]]이라 하여 장기간 노동자들의 신체를 구속하고 육체노동을 시키는 노동 착취가 성행했다. 현재는 일본 노동 기준법 5조에 의해 금지되었다.] 1912년부터 1914년까지 공사기간 36개월 동안 사망자가 100명 이상 나왔다. 병든 노동자에게도 일을 열심히 안 한다고 폭행을 가했고, 사망하면 현장 부근의 숲에 묻었다고 한다. 이 때문인지 개통 이후에도 열차가 터널 안에서 급정거하는 사고가 종종 발생하자 1959년 [[일본국유철도]]는 1 km 떨어진, 시신을 묻은 공터 앞에 위령 목적으로 조그만 석조 [[지장보살]] 입상 한 좌를 세웠다. 보살상 뒤편 공터에서 '''유골 50여 구'''를 수습했다고 한다. 더 무서운 사실은 현장 감독자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명목으로 노동자를 삽으로 때려 죽인 뒤 본보기로 '''시신을 터널 벽에 세워놓았다'''는 것이다.[* 일본어로는 히토바시라(人柱)라고 한다. 본디 히토바시라는 무너지기 쉬운 건축물에 인신공양을 바쳐 튼튼하게 하려는 주술적 목적으로 하는 것이지만, 여기서는 그런 주술적인 이유 따위는 전혀 없었다.] 완공 이후 전설처럼 구전되던 내용이었는데, 1968년 산리쿠 해역지진(三陸沖地震)이 일어나 터널을 수리하던 중 1970년 터널 벽 안쪽에서 '''두개골에 금이 간 해골'''이 발견되어 사실로 드러났다. 이후 조사에서 시신 10구를 추가로 발견하여 마을 공동묘지에 안장했다. 1980년에는 [[카네하나 신호장|카네하나역]] 앞에 [[https://upload.wikimedia.org/wikipedia/commons/b/b4/J%C5%8Dmon_tunnel01.JPG|위령비]]를 세웠다. 이 위령비에선 망자들을 피해자나 희생자가 아니라 '순직자'라고, 마치 공사 중 불의의 사고로 죽은 양 묘사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